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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12월 휠체어는 나의 날개 (차인홍)
글쓴이 관리자
날짜 2016-12-04
조회수 6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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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는 나의 날개

차인홍 지음

마음과생각 / 201212/ 248

 

저자 차인홍

한국 장애인 최초의 미국 음대 교수이자 바이올리니스트이며 대학 오케스트라 지휘자이다. 그의 음악 속엔 영혼을 매만지는 깊은 울림과 감성이 있어 노래하는 바이올리니스트’, ‘깊고 섬세한 지휘자라 불리기도 한다. 1958년 충남 대전에서 태어나 두 살 때 소아마비를 앓은 뒤 재활원에서 생활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기적처럼 바이올린을 접했다. 그 후 모든 삶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 속에서 음악인의 길로 이어졌다. 가난과 장애, 초등학교 졸업장이 그를 둘러싼 환경의 전부였지만, 누구보다 놀라운 만남의 기적과 경이로운 삶의 비밀들을 경험하며 청년기를 보냈다. 그 과정에서 베데스다 4중주단으로 연주 활동을 했으며, 미국 신시내티 대학, 뉴욕 시립대학,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각각 학사, 석사, 박사 학위까지 받게 된다. 이후 미국 오하이오 주 라이트 주립대학의 바이올린 교수 겸 대학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되어 후학을 양성하는 일과 전 세계에서 연주 활동을 하는 일, 그의 생애를 통해 써내려왔던 놀라운 사랑 이야기를 전하고 나누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그의 이야기들은 각종 매스컴에 소개되고 KBS <수요기획><글로벌성공시대>에서도 방영되면서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다.

 

현재 그는 미국 오하이오 주 데이튼에서 부인 조성은 씨와 두 아들 진, 용과 함께 살며 인생 후반기의 러브 스토리를 써내려가고 있다.

 

Short Summary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라는 의미를 가진 신조어 넘사벽은 우리 시대 청춘들의 상황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표현 중 하나다. 대학의 넘사벽, 취업의 넘사벽, 가난의 넘사벽 등 우리 청춘들은 너무 많은 넘사벽 앞에서 좌절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다. 저자는 인생의 장벽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청춘들에게 자신이 살아온 삶을 통해 희망을 전해준다. 그리고 그 장벽을 뛰어넘는 방법으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제시한다. 자신이 노력했을 때는 이룰 수 있는 것이 없었으나, 모든 것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긴 순간 하나님께서 불가능한 일들을 이루어주셨다는 것이 지은이의 고백이다.

 

사실상 저자는 절망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산 사람이다. 소아마비로 두 살 때부터 걷지 못하고 휠체어에서 생활했으며, 집안 사정도 어려워 아홉 살 때는 재활원에 맡겨져 성장했다. 장애인인 데다가 정규 학교의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고,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던 그는 스물네 살 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검정고시로 모든 과정을 마치고 기적적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신시내티 대학, 뉴욕 시립대학, 사우스캐롤라이나 대학에서 학사, 석사, 박사 학위를 차례로 받고 우리나라 장애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음악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이런 극적인 변신 뒤에는 연탄광에서 하루 10~15시간씩 바이올린 연습에 몰입했던 고통의 시간들과 졸린 눈을 비벼가며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위해 이를 악물었던 눈물의 시간들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과 희망에 대한 끝없는 갈구가 밑바탕이 되었다. 하지만 지은이는 자신의 성공이, 자신의 능력이나 노력 때문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그는 나는 내 생애의 어느 한 부분도 고생담으로 여겨지길 원하지 않는다. 나는 고생한 사람이 아니라 사랑 받은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한 편의 러브스토리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차례

추천의 글 / 서문

 

1악장_ 사랑은 우리에게 악기를 건넨다

 

모든 인생은 선물이다

넘을 수 없는 장벽 앞에서 / 광야를 지나 더 깊은 골짜기로 / 누구나 가야 하는 길이라면

누군가 있을지도 모른다 / 내게 주어진 악기

기다리는 자에게 찾아오는 것

자신에게 충실하는 것이 먼저다 / 너는 눈빛이 다른 아이였다 / 내게 음악성이 있다면

때론 에돌아가는 듯해도

바이올린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 그늘에서 나와 양지로 / 휠체어, 날개가 되다

훈련 3개월 만에 이룬 쾌거! /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이유가 있다

 

2악장_ 사랑은 슬픔마저도 함께하는 것이다

 

가장 비천한 곳에서 가장 깊은 은총을

내가 할 수 있는 것 / 중요한 것은 감동이다 / 주님은 나의 목자

연탄광에서의 전투 / 절박한 환경은 축복이다

만남의 기적, 하나님의 타이밍

낮과 밤이 반복되듯이 / 정립회관, 김남윤 교수님 / 최고의 매니저, 김태경 선생님

하나님의 타이밍

동행의 신비를 보여준 한 사람

내게도 찾아온 연애 / 때론 사랑이 아플지라도 / 더 사랑하는 자에게 더 큰 용기가 생긴다

 

3악장_ 사랑은 우리의 길이 된다

 

나의 유학생활 보고서

작은 순종, 큰 은혜 / 악보 안 보는 지휘자 / 나를 위해 싸움도 불사했던 사람들

고통이 깊을 때 아침이 온다

가슴 한쪽이 고통스러울지라도 / 가난한 날들의 행복 / 한 번의 외면과 한 번의 수용

또 한 번 건너야 할 강

마침내 반환점을 돌다

마른하늘의 구름 한 조각 / 풍족한 실업자 / 하나님, 한 번만 도우소서

사람이 무엇이관대

 

4악장_ 사랑은 우리를 꿈꾸게 한다

 

처음처럼 마지막까지

약함의 축복으로 / 세 가지 분야의 평가 / 교수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어메이징 마에스트로

음악은 훈련이다 / 음악은 관계다 / 음악은 핸디캡을 뛰어넘는다

음악의 절정은 앙상블이다

좋은 단원이 되려면 / 중국 재활원을 시발점으로 / 나의 꿈, 하나님의 꿈

 

서문 : 멈출 수 없는 사랑으로

 

나는 비행기에서 창가 쪽 좌석에 앉아 점점 멀어져가는 지상 위 풍경을 바라보는 걸 너무도 좋아합니다. 비행기가 하늘 높이 올라갈수록 더 많은 풍경을 가슴에 다 품은 듯한 충만함에 큰 소리라도 지르고 싶을 지경이 되곤 합니다. 이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일 것입니다. 내게 소아마비가 찾아온 두 살 이후, 나의 놀이터는 방 안이나 마루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담 너머에서 들려오는 동네 아이들의 뛰노는 소리가 언제나 내 귀를 자극했지요. 오전이면 놀고 싶고, 오후가 되면 뛰고 싶고, 저녁이 되면 날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면 나는 형님 들으라는 듯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 좀 밖에 데려다 달라는 항변이었습니다.

 

그럴 때 형님은 나를 업고 동네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이 마침 버스 종점이었던 터라 빈 버스가 오면 나를 버스 맨 앞자리에 앉혀서 반대편 종점까지 왕복으로 실컷 다녀오라는 뜻이었습니다. 방 안에만 살아야 하는 나를 위한 형님의 절묘한 아이디어였던 것입니다. 그때 나는 운전석 바로 뒷자리에 앉아 그 큰 창문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는 걸 너무도 좋아했습니다. 내 눈앞에 펼쳐진 세상의 큰 길, 작은 길 하나하나 다 놓치지 않으려고 얼마나 열심히 보고 또 보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매의 눈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였나 봅니다. 10년 전, 나의 이야기가 처음 방송이나 사람들에게 소개되면서 나는 지나온 나의 생을 매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소아마비로 걸을 수 없었던 두 살 때부터 나의 앞에, 나의 뒤에, 그리고 나의 좌우 옆에 누군가가 계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누군가가 나의 앞뒤, 좌우에서 나와 함께 계셨기에 내가 여기까지 이를 수 있었다는 게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뒤로 10년이 지났고, 나의 첫 번째 책인 아름다운 남자, 아름다운 성공도 절판이 되었지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멈출 줄 몰랐습니다. 나는 그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의 이름이 바로 사랑이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악장_ 사랑은 우리에게 악기를 건넨다

 

모든 인생은 선물이다

내가 가난과 소아마비 장애를 딛고, 성공한 미국 대학 교수로, 또 바이올리니스트로,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방송에 몇 번 소개되었기 때문일까요? 세계 어디를 가든, 인생의 장벽을 넘어서는 특별한 비법을 물어오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저마다의 한계 앞에서 좌절하며 울고 있는 영혼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일 것입니다. 나는 그런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내가 그토록 막막함을 느끼던 때가 언제였나 돌아보곤 합니다.

 

나는 1976년도부터 베데스다 현악 4중주단의 제1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을 했습니다. 나를 포함해서 네 명의 재활원 출신의 아이들로 구성된 베데스다 4중주단은 그 구성에서부터 활동에 이르기까지 순전히 주변 분들의 도움으로 움직이곤 했습니다. 그 일환으로 대전의 목원대학교에서 열린 오케스트라 겨울합숙훈련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짚은 우리들에겐 초등학교 졸업장밖에 없었지만, 대학생들과 연배가 비슷하니 참여해도 된다는 주변 분들의 배려 덕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느낀 것은 냉혹한 현실에 대한 자각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좋은 가정에서 정규 과정의 음악 수업을 받고 자란 그들의 배경은 내게는 넘을 수 없는 벽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동안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세상의 벽을 마주한 심정이랄까요. 초등학교 졸업장, 가난, 생존, 휠체어……. 내가 가진 조건이나 배경을 다 헤아려보니 내 힘으로는 결코 어떤 미래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사실과 맞닥뜨렸습니다. 그 아득한 벽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내가 느꼈던 한계나 절망과 달리, 30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대학교수로, 지휘자로, 또 휠체어를 타고 자유롭게 전 세계를 돌며 연주하는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결코 넘어설 수 없다 생각했던 그 벽을 나는 언제 넘어섰던 것일까요?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그 벽을 넘어서게 되었을까요?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면 나도 누군가의 처진 어깨를 조금이나마 일으키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그것이 스펙보다 스토리가 중요하다는 이 시대에 나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유입니다.

 

기다리는 자에게 찾아오는 것

내가 아홉 살 되던 해에 성세재활원이라는 장애인 시설에 맡겨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곳에 가면 최소한 초등학교 과정을 이수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러나 정부 보조가 열악했던 시대상을 반영하듯, 재활원의 운영 현실은 영양실조로 쓰러지는 친구가 있을 정도로 매우 열악했습니다. 재활원에 맡겨지던 날부터 나는 무어라 형언하지 못할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의 어느 날 밤엔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 창문 너머의 달빛을 바라보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휘영청 달은 높이 떠 있고, 나는 눈을 뜬 채 내 가슴속에 밀려드는 고독감을 꼼짝없이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 서늘하고 커다란 재활원의 창문을 보고 있노라면 한겨울이든 한여름이든, 봄이든 가을이든 왜 그렇게 가슴 한구석이 시려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미션스쿨로 세워진 그곳에 들어가면서부터 나는 난생처음으로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의 존재에 대해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되었지요. 물론 나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때 그 시절의 골짜기도 주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속에 지나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 당시 날마다 기적처럼 이어졌던 만남의 축복은 나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자식처럼 돌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게 해주는 증거였습니다.

 

그중 가장 놀라운 증거는 강민자 선생님을 통한 바이올린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봄볕이 따스하던 그날, 우리는 여느 때처럼 재활원 마당에서 목발을 짚거나 땅바닥을 맨몸으로 구르며 천진하게 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서울대학교 출신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강민자 선생님이 유성온천에 오셨다가 봄볕이 좋다는 이유로 택시에서 내려 만년교를 혼자 걸으셨습니다. 그 다리를 건너자 둑 옆에 있던 재활학교가 보였고, 그곳에서 놀고 있는 장애아들의 모습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선 강 선생님에게 어떤 마음을 불어넣어 주셨던 것일까요? 선생님은 갑자기 재활학교 안으로 들어오시더니 제가 이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쳐주고 싶은데요.”라고 제안하셨습니다.

그 당시 바이올린을 배운다는 것은 꿈 같은 일이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바이올린 수업 첫날, 강 선생님이 들려주셨던 바이올린 소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악기 소리가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지, 어떻게 그 소리가 내 마음속을 뚫고 들어와 나를 어루만질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바이올린에 대한 나의 사랑은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네가 아직 나를 몰랐을 때, 나는 네 이름으로 너를 불렀다.

나는 여호와다. 나 외에 다른 하나님은 없다.

네가 나를 알지 못하나, 내가 너를 강하게 해주었다.

- 이사야 454-5

 

이후로 나는 왜 그렇게 연습을 멈출 수 없었던 것일까요?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나에 대한 존중감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내 손에 맞는 악기,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이 소리를 사랑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충실했던 것입니다. 선생님이 내게 주신 특별한 기회들도 잊을 수 없습니다. 바이올린을 배운 지 1년쯤 지난 후였을까요? 충청남도에서 개최하는 음악콩쿠르에 출전하여 영예의 1등을 차지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특별한 무대에 종종 서게 되었습니다. 강민자 선생님은 내게 왜 그런 기회들을 주고 싶어 하셨을까요? 나중에 어른이 된 후 강 선생님과 미국에서 재회했을 때, 그때의 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차 교수는 그때 참 눈빛이 남다른 아이였어. 이런 생각이 들곤 했지. 저 아이는 정말로 나를 기다렸구나.”

 

미국 생활을 하며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나는 남다른얼굴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구두 수선공이든, 환경미화원이든, 혹은 학자나 예술가든 내가 남다르다고 느낀 사람들의 얼굴 속에는 평안과 행복, 당당함, 겸손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어떤 일을 하든지 그들에게는 결코 초라한 표정이 없었다고나 할까요? 비단 표정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 또한 존경받을 만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에게선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한 값진 열매가 있었고, 자신에 대한 존중감과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모습이 있었습니다. 만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빛을 전해주는 느낌까지 있었지요. 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원리라고 믿습니다.

 

때론 에돌아가는 듯해도

그렇게 중학교 3년 과정을 지날 즈음,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일본 태양의 집으로부터 초청장이 날아왔던 것입니다. 일본에서 최초로 장애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서 물건을 생산하는 대단위 공장들이 있는 태양의 집은 다섯 명의 학생들을 초청하여 1년간 연수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했습니다. 일본에 가게 되면 바이올린을 더 이상 배울 수도 없고, 음악에 대한 꿈도 접어야만 했지만, 어차피 나는 음악가로서의 꿈을 꿀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1년 동안의 음악적 공백이 어떤 의미인지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의 삶을 인도하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그 공백의 의미를 다 알고도 남으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나를 일본으로 이끌고 계셨습니다. 내게 음악의 길을 열어주셨던 그분이 이번에는 왜 나를 거기까지 인도하셨던 것일까요? 나는 그 속에서 1년 동안 살면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누구든 장애인이 될 수 있기에 장애인을 위한 투자와 배려를 당연하게 여기는 그곳에서 나는 성격마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던 듯합니다. 외부의 시선 때문이든 스스로 만든 굴레 때문이든 자꾸만 움츠러들었던 내가 어느덧 도전하고 성취하려는 태도도 갖게 되었습니다. 사람들과 만나 어울리고 교제할 뿐 아니라 새로운 일에 뛰어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아마도 그것이 일본에서의 생활을 통해 내게 주시려 했던 하나님의 첫 번째 선물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실제로 나는 일본에서 양지의 운동장을 마음껏 뛰어다녔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고요? 그것은 내게 새로운 날개가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태양의 집에서는 양다리 모두 힘이 없는 내가 목발을 짚고 다니는 걸 보고 곧바로 휠체어 한 대를 내어주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평소 좋아하던 운동을 마음껏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운동을 하다 보니 나도 몰랐던 내 안의 운동신경들이 점점 살아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덕분에 나는 석 달 후 일본 오이타에서 열린 제1회 아태장애인 경기대회에 한국 대표로 출전, 휠체어장애물 경기, 800미터 달리기, 소프트볼 던지기에서 각각 금, , 동메달을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 떠났던 일본에서 하나님은 내게 메달까지 안겨주고 계셨습니다.

 

어디 운동 경기뿐이겠습니까? 그 시절, 내가 운동을 하느라 휠체어를 누구보다 민첩하고 정교하게 다룰 수 있게 된 것은 훗날 내가 지휘자로 살아가는 데에도 적잖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음악회를 관람하러 오는 많은 청중들은 무대 위에 세워진 지휘 단상을 보며 매우 놀라워합니다. 생각보다 너무 짧고 급한 경사로로 단상이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짧고 가파른 경사로에 내가 순식간에 올라가서 지휘하다가 쏜살같이 내려오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것까지 내다보시고 내 나이 열여섯에 나를 일본에 보내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실수가 없고, 그분 안에 살면 우리가 겪는 모든 경험들이 다 유익하다는 것을 이 일을 돌아봐도 알게 됩니다.

 

2악장_ 사랑은 슬픔마저도 함께하는 것이다

 

가장 비천한 곳에서 가장 깊은 은총을

일본의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갈 때 그전과는 사뭇 다른 기대감과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뭔가가 새로 시작될 것 같고, 그 일을 잘해낼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나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기대와는 정반대의 것이었습니다. 강민자 선생님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고, 나는 재활학교가 아닌, 집에서 생활해야 했는데 내게 주어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중학교 졸업장이 없는 터라 고등학교에는 진학할 수가 없었습니다. 가족들과 친지 분들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도장 파는 기술이라도 가르쳐야 하지 않느냐?”고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유독 손발이 묶여 있었기 때문일까요? 나는 제대로 된 믿음이 없었음에도 내 인생을 내가 주관할 수 없다는 사실만큼은 확실하게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누군가의 인도하심을 목마르게 바라보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이 올 때 감사하며 달려갈 준비를 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도 보고 계셨던 걸까요? 어느 날 갑자기 고영일 선생님이 나를 찾아오셨습니다. 강민자 선생님의 대학 후배라 그전부터 나와 잘 알고 지냈던 이분은 당시 대전의 목원대학교 음악대학에 강의를 나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마음에 다음과 같은 꿈이 생겼다고 합니다. ‘재활원 출신의 아이들 네 명으로 현악 4중주단을 만들어서 세계적인 4중주단으로 키워야겠다.’ 우리는 선생님의 그 꿈 때문에 음악을 다시 할 수 있었습니다. 재활학교 이사장님이셨던 남 장로님은 우리 4중주단의 이름을 은총의 샘이라는 뜻을 지닌 베데스다 4중주단으로 지어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너희들은 악기의 좋고 나쁨은 신경 쓰지 말고, 사람의 마음을 울릴 수 있는 소리를 내는 데 집중해라. 악기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너희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소리를 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그 말씀은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었습니다. 마음 깊이 동의가 되었습니다. ‘맞다. 현악기는 그게 가능하다.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것,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연습은 각자의 몫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가끔씩 음악적인 기법을 가르쳐주기도 하셨지만, 대부분의 연습 시간은 혼자 악기를 붙잡고 싸우는 시간이었습니다. 연습 분량이나 연습 태도에 대해 가혹할 만큼 혹독하게 요구하시는 선생님의 주문에 따라, 우린 날이면 날마다 각자의 연습실에서 악기를 붙잡고 홀로 분투를 해나가곤 했습니다. 좁고 후미진 주택가의 좁은 집에서 네 사람이 함께 먹고 자고 생활하며 살았던 그 3년의 시간은 어쩌면 내 생애 가장 힘들었던 전투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안의 고독한 나와 싸우고, 내 안의 무기력과 싸우며, 내 안의 뛰쳐나가려는 욕구와 싸우던 시간이었습니다. 새벽 6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내 연습실이던 연탄광에 들어설 때 온몸을 휘몰아치던 새벽 칼바람은 얼마나 매서웠던지요. 손가락은 얼지 않았지만 하루 10시간 이상 휠체어 위에 놓여 있던 내 발가락들은 심하게 얼어 터져서 상처 나고 곪는 일들이 다반사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고백하건대, 우리는 그 시절 가장 깊은 음악, 가장 아름다운 화음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음악 이론과 지식은 잘 모를지언정 온몸과 마음을 다 적시며 음악의 세계 속에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우리 모두는 유학 생활을 하며 음악 공부를 했는데 유학 기간에도 그때만큼 심혈을 기울이며 음악에 집중한 적이 없다 할 정도로 그 시절의 음악은 우리의 전부였습니다. 그 치열한 몰입의 결과였을까요? 4중주단이 모여 연주를 하면 말로 표현 못 할 앙상블이 우리를 감싸곤 했습니다. 서울에서 내려온 음악가들도 우리가 내는 앙상블에 놀라워하며 박수를 보내곤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베데스다 4중주단으로 연습하고 활동했던 3년은 지금의 음악 인생을 가능하게 한 밑거름의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훗날 내가 유학 생활을 마친 뒤 대전에 와서 대전시향 악장으로 일할 때 나보다 훨씬 화려한 경력을 가진 연주가들을 이끌 수 있었던 힘도 이미 그때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때 나는 손가락을 움직이는 테크닉이 아니라 음악의 감정, 음악의 조화, 음악의 느낌을 확실하게 배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요? 그 비밀은 바로 간절함이었습니다. 그 옛날 예루살렘 양문 곁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 있던 환자들처럼, 우리 4중주단은 늘 간절하게 연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얼마 전 한 목사님이 성경의 이 부분을 이렇게 설교하시더군요.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한 후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이든지 나았다는 베데스다 연못가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때 그 연못가에 모여 있던 무리들 중 물이 움직였을 때 어떤 사람이 제일 먼저 들어갔겠습니까? 가장 많이 아픈 자, 어떤 것으로도 치료되지 않는 자, 그래서 베데스다 연못이 사무치게 간절한 자가 가장 먼저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했기에 베데스다 연못에 온몸을 담갔을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으며 나는 우리 베데스다 4중주단이 받은 축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장 초라했기에 가장 간절했던 그때, 그래서 가장 특별하고 화려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이야말로 내게 허락된 가장 큰 축복의 시간이었음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3악장_ 사랑은 우리의 길이 된다

고통이 깊을 때 아침이 온다

3년여의 시간 끝에 베데스다의 해체라는 뜻밖의 사건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청춘을 다 바치듯 살았던 시간이었기에 그 허무함은 말로 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의 소식을 들은 정립회관(한국 소아마비협회) 측으로부터 후원 약속이 날아왔습니다. 나는 이때부터 한국 바이올린계의 대모라 알려진 김남윤 교수님으로부터 특별 레슨을 받는 수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서 알게 된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낮이 지나면 밤이 오고,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듯 인생이란 어두운 터널과 밝은 들판을 반복해서 지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하나님께서는 마치 하나의 오케스트라 교향악단을 구성하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내 인생의 오케스트라 속에 포함시키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차곡차곡 단원들을 모으시던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김태경 선생님을 부르셨던 게 분명합니다. 당시 총각이셨던 김 선생님은 유복한 집안의 엘리트 출신으로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어 보이셨는데, 우리가 탄복한 것은 이분이 인품까지 더없이 좋으셨다는 점입니다. 교회에 갈 때마다 휠체어를 밀어주는 등의 번거로운 일을 기꺼이 맡으셨던 선생님은 나중에 우리의 사정을 알고 밤마다 오셔서 영어를 가르쳐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차츰 우리의 손과 발이 되어 베데스다의 대외활동 업무까지 관장해주셨습니다. 무보수 매니저였음에도 그분만큼 겸손하고 성실한 매니저가 없다 할 정도로 지속적으로, 끝까지 책임을 다해 모든 일을 처리해주셨습니다.

 

바이올린을 시작한 것도 그렇지만 유학을 가게 된 일 역시 우리가 계획하거나 꿈꿔본 적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김태경 선생님을 만났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서울대학교의 신동옥 교수님으로부터 관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마 우리 베데스다 4중주단이 내는 앙상블을 귀하게 보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평소 애정 어린 시선으로 우리를 보시던 신 교수님은 어느 날 우리 앞에서 김태경 선생님께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이 친구들을 유학 보내는 게 어떨까?” 신동옥 교수님께서는 미국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서 공부를 하셨는데, 그곳에는 라살이라는 유명한 현악 4중주단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교수님은 그 4중주단에 우리를 소개해서 배움의 길을 열어주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교수님의 그와 같은 생각과 의도를 알게 된 김태경 선생님은 이를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발 빠르게 준비해나갔고, 마침내 신시내티 음대 측으로부터 입학을 허락한다는 초청장이 날아왔습니다. 그것도 우리 멤버들이 막 고등학교 검정고시 과정을 패스한 바로 그 시점에 말입니다. 놀라운 일은 그 후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학비는 학교 측에서 면제해준다지만, 미국에서 생활하려면 생활비도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아산재단에서 학비는 물론 생활비까지 우리를 지원하기로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그와 같은 지속적인 지원이 가능하도록 유학 기간 중에도 중간에서 모든 처우를 도맡아 해준 김태경 선생님은 사람을 돕되 어디까지 도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신 분입니다.

 

이분은 한국에서 우리를 돕다가 우리의 유학 시점에 본인도 공부를 더 해야 한다고 유학길에 오르셨습니다. 하지만 막상 미국에 도착해보니 언어도 안 통하고 발도 묶여 있는 베데스다 네 명을 누군가 도와야 한다는 사실과 맞닥뜨렸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그곳에서도 자신의 공부는 미루신 채 우리 네 명을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해주셨습니다. 손수 밥 짓는 일에서부터, 선생님은 마치 자식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아버지처럼 그렇게 우리를 돕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너무 염치가 없어 어떤 날은 등을 떠밀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선생님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너희가 자리 잡는 거 보고 떠난다.”

그러던 선생님은 유학 후 2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우리 곁을 안심하고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가 결혼식까지 올리신 후, 아름다운 신부님과 당신의 진로를 대폭 수정하신 채 미국으로 다시 오셨지요. 신학 공부를 해서 목회자가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런 결정을 하셨는지 궁금해하는 우리들에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베데스다를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어. 그게 내가 목회를 하려는 이유야.” 내가 시간이 더 흐른 후에야 깨닫게 된,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다함없는 사랑을 그분은 그때 이미 깨닫고 계셨던 걸까요?

 

4악장_ 사랑은 우리를 꿈꾸게 한다

 

어메이징 마에스트로

아름다운 음악이 장애나 어려운 환경을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내가 확신하게 된 것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교향악단의 객원 지휘자로 초대를 받아 지휘를 할 때였습니다. 옛날에는 거의 모든 명판들이 이 오케스트라를 통해 나올 만큼 그 음악적 깊이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교향악단이었기에 내 마음은 설렘과 함께 걱정도 컸습니다.

 

그런데 첫 연습을 위해 연주홀을 찾은 나는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그 유명한 교향악단의 연습실이라고 하기에는 스튜디오의 입구부터가 엉성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깨진 슬레이트 지붕에 금이 간 벽돌……. 붕괴 직전처럼 보이는 건물에다 출입구는 또 어찌나 불편하던지 휠체어를 타고 들어갈 수조차 없을 정도였습니다. 간신히 들어온 먼지 날리는 스튜디오에서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단원들을 기다렸습니다.

 

잠시 후, 악기를 들고 들어오는 단원들을 보자 나는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밖에서 어슬렁거리던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동네 일꾼들이라고만 생각했지, 그들이 바로 그렇게도 유명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첫 대면부터 심상치 않은 인상을 받은 나는 알렉산더 슈스틴이라는 유명한 악장과 먼저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틀 동안 리허설을 하고 녹음을 한 후 마지막 토요일에 연주회를 하려던 나의 예정을 깨고, 그는 첫날부터 아무런 사전연습 없이 음만 맞춘 후에 바로 녹음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속으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곡의 첫 음이 하고 나는 순간, 나는 그게 가능하겠구나라고 확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너무나 웅장하고 아름다운 소리가 터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나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 속에서 그들이 왜 그토록 깊이 있는 음악가로 정평이 나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마치 상임지휘자처럼 바라보고 존중했습니다. 에어컨도 없는 공간에서 몇 시간이나 옷이 흠뻑 젖을 정도로 연습하는데도 누구 하나 짜증을 낸다거나 빨리 끝내자고 성화를 부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내가 예정보다 5-10분 정도 일찍 끝내려 하자 한 번만 더 해보자며 정해진 연습 시간을 훌쩍 넘길 정도였습니다.

 

놀랄 만한 일은 또 있었습니다. 동네 녹음실보다 더 보잘것없어 보이는 녹음실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곳에서 유럽의 엄청난 연주자들이 녹음 작업을 한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더 놀란 것은 20대밖에 안 된 엔지니어에 대한 단원들의 순종이었습니다. 연주 도중 그가 마이크로 스톱을 외치면 단원들은 일제히 연주를 멈추곤 했습니다. 그러면 그가 어떤 악기의 어느 부분의 소리가 이상하다든지의 지적을 했고, 단원들은 곧바로 교정을 해서 연주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엔지니어보다 두세 배는 나이가 많은 단원들도 100퍼센트 순종을 하며 따라오는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나는 그곳에서 편집된 연주실황을 듣고 몇 군데를 지적했고, 그러자 그는 곧바로 수정을 해서 내게 마스터 테이프를 건네주었습니다. 내가 소니 음반회사에 부탁해서 음반을 내려 한다고 하자, 그는 말했습니다. “혹시 누가 이 테이프를 리마스터링(고도의 기술 전문가가 밸런스나 음질 등의 완벽을 기하기 위해 기술적인 작업을 다시 하는 것)한다면 음반에서 제 이름을 빼주십시오.” 나는 이 친구가 왜 그런 얘기까지 할까?’ 싶었습니다. 고가의 비용이 드는 일이었지만, 당연히 리마스터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 후 나는 연주회까지 잘 마치고 서울에 돌아가 소니 관계자와 함께 음반 일을 추진했습니다. 마스터 테이프를 들은 소니 측 전문가에게 내가 물었습니다. “리마스터링은 어떻게 하기로 했나요?”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안 해도 되겠습니다.” , 그 대답을 듣고 얼마나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지……. 그 정교하고 화려한 녹음 장비를 갖춘 소니에서도 더 이상 손볼 게 없을 정도의 기술을 젊디젊은 러시아 엔지니어가 갖고 있었다는 게 새삼 놀라웠습니다. 허름한 스튜디오에서 가장 웅장한 소리를 내는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초라한 녹음 장비로 가장 섬세한 녹음을 해낸 엔지니어, 이들을 생각하니 감동이 물밀듯 밀려왔습니다.

 

, 그러고 보니 러시아에서 나는 또 한 사람에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베토벤의 피아노협주곡 제5<황제>를 연주한 피아니스트 이재혁이란 친구였습니다. 시각장애인인 그는 피아노 건반뿐 아니라 악보 전체를 외워서 피아노를 쳤는데, 내가 볼 때 그의 음악은 앞이 안 보이는 장애에 전혀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이 사실을 그곳의 천재 엔지니어도 알아보았던 것 같습니다. 단원들의 미세한 실수 하나까지 짚어내며 연주를 자주 중단시켰던 그도 이재혁의 연주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멈추게 하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음악은 결코 어려운 환경에 갇히거나 신체적 장애에 굴복되는 법이 없다는 사실을 나는 그곳에서 깨달았습니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과의 연주회 이후, 나는 휠체어에 앉아서 지휘하는 나의 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앉아서 지휘하기 때문에 내 마음의 노래는 이미 다른 사람들보다 더 넓고 푸른 창공으로 날아다니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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